📜 역사의 결

임진왜란 전 조선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 치유의 숲 2026. 1. 28. 13:20
 

주자학을 깊이 믿었던 조선의 유학자들은 정치의 이상을 덕치(德治, 도덕으로 다스리는 정치)라고 여겼다. 강한 법이나 힘을 쓰지 않고, 백성을 교화(가르치고 이끄는 것)하는 정치를 가장 올바른 정치라고 본 것이다. 이 생각 자체는 나쁘다고 할 수 없고, 오히려 이상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가 된 것은 이 생각이 지나치게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군대를 기르고 국방력을 튼튼히 하는 것마저도 덕치를 해치는 일이라고 여겼다. 국가를 지키는 데 꼭 필요한 군대를 현실적이고 실용적으로 보지 않고, 도덕에 어긋난다고 무조건 부정적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도덕만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고, 심지어 나라까지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굴욕적인 평화라도 전쟁만 피할 수 있다면 괜찮다고 여기는 분위기까지 있었다. 조선의 국방이 비정상적으로 약해진 이유는 강대국에 의존하려 했던 사대주의(강한 나라를 섬기며 의지하려는 외교 태도) 때문만이 아니라, 왕과 관료들이 이런 주자학적 정치관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도 큰 원인이었다.

 

주자학적 사고는 자연스럽게 군인을 낮춰 보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게다가 강대국에 의존해 평화가 유지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군인에 대한 무시는 더 심해졌다.

 

그래서 유학을 공부하던 사대부(양반 지식인 계층)들이 군 복무를 피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도상으로는 이들도 군역(군대에 복무해야 하는 의무)이 있었지만, 실제 시행은 엉망이었고 빠져나갈 구멍이 많았다. 서울의 성균관이나 지방 향교에서 공부하는 유생(학생)들은 군 입대가 면제되거나 미뤄졌고, 관직에 오르면 아예 군역이 면제되었다.

 

‘십만 양병설(군사 10만 명을 길러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고 알려진 이율곡도 실제로 군에 가지는 않았다. 『중종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지금 유생들은 모두 군역을 피하려는 자들입니다. 사족(士族, 양반 가문 사람들)들은 유학을 한다고 하면서도 향교에는 다니지 않습니다.”

 

요즘 일부 사람들이 군대를 피하려 편법을 쓰는 것처럼, 당시에도 힘 있는 집 자제들이 군대를 피하기 위해 향교에 이름만 올려두는 경우가 많았다.

 

『인조실록』에는 사헌부(관리들을 감찰하던 관청)가 인조에게 이런 건의를 한 내용도 있다.


“향교에 등록된 사람들은 대부분 사족이니, 이들을 군대에 보내면 죽으러 가는 것처럼 여길 것입니다. 과거 시험에 떨어진 사족들은 군보(군역으로 충성하는 일)에 보내지 말고, 다른 명목을 만들어 마음을 달래 주십시오.”


이는 사실상 과거 시험 준비생인 양반들을 군대에서 빼 달라는 요구였다. 군역 기피를 단속해야 할 기관이 오히려 면제를 건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군역 제도가 거의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전쟁이 터지자 다급해진 조정은 들판에서 농사짓던 농민들을 급히 끌어 모아 병사로 채웠다. 이를 속오군(束伍軍, 급히 편성된 임시 군대)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무기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채, 한겨울에 얇은 옷을 입고 싸워야 했다. 말 그대로 조직도 훈련도 엉망인 오합지졸이었다. 여기에서도 공부하던 유생들은 대부분 빠졌고, 오히려 주인을 따라 나온 노비들이 더 많이 참전했다.

 

지휘할 사람도 부족했다. 그래서 예전에 군에 있었던 퇴역 군관이나, 벼슬은 못 했지만 무과 시험에 합격했던 사람들이 급히 동원되었다. 전쟁을 이끌 장수도 부족해, 갓을 쓴 문관(문신)들이 어쩔 수 없이 군을 지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사족들은 정치 싸움에서는 매우 가혹했다. **사화(정치적 숙청 사건)**와 붕당 싸움(정파 간의 권력 다툼) 속에서 정적에게는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들에게 진짜 적은 외적이 아니라 정치적 경쟁자였다. 그래서 외적이 침입해 오는 상황에서도 정적과의 싸움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을 겪고도 이런 사고방식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선조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의 상황을 살펴보러 온 명나라 병부(지금의 국방부)의 하급 관리가 선조에게 전쟁의 원인을 이렇게 말했다.


“예전 강국이었던 조선이 선비와 백성 모두 농사와 독서에만 힘쓴 탓에 이런 변란을 불러왔습니다.”

 

뼈아픈 지적이자 조롱에 가까운 말이었다. 조선의 비극은 침략을 많이 받아서가 아니라, 오랜 평화 속에서 전쟁과 군대를 잊어버리고 지나치게 문약(무력보다 학문만 중시하는 경향)해진 데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군사제도 및 조직
조선의 병역제도는 조선 초기 정도전이 만든 양인개병제로 출발하였다. 이는 양인이 일정 기간 교대로 군에 들어와 복무(군역)하는 제도로써 평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는 병농일치의 제도였다.
양인이란 노비를 제외한 모든 성인 남성을 말하며 양반, 평민 가리지 않고 모든 남자는 16세부터 환갑까지 해마다 일정기간 군역을 담당해야 했다. 그러므로 남자는 인생의 44년이 병역의무 기간이었다.
그리고 군역과 별도로 나라가 백성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징발하는 요역(호역, 부역또는 잡역 등 여러 말로 불리었음)이 있었다. 그러므로 백성이 나라에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하는 노력봉사는 군역과 요역 두가지였고 두가지는 성격과 운영 체계가 달랐다.
군역과 요역은 앞에서 언급한 여러 이유로 개국 후 200년 정도 지나면서 시행이 극히 문란해졌다. 군역을 옷감이나 곡식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늘고 남을 사서 대신 군에 보내는 대립군 이라는 것도 성행했다. 그리하여 정부는 면포를 바쳐 군역을 대신하는 보법을 제정하고 운영하였다.
그리고 군역은 시간이 지나며 차츰 요약화되어 갔다. 보법이 시행되면서 면포를 바쳐 군역을 대신하는 사람이 늘어나 병사를 구하기 힘들게 되고, 요역도 요리조리 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나중에는 요역할 사람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나라에서는 군인에게 요역(잡일)을 시키게 되는데 군인들은 이중의 부담을 지게 되어 도망자가 많이 나왔다. 이리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싸울 수 있는 장정을 구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조선은 건국 후에도 상당 기간 일부 세력가들이 사병을 보유하고 있어서 군사적 정치적으로 불안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는 태종이 일체의 사병을 없애고 모든 군사를 자신의 밑으로 집중하면서 해소되었다. 이후 세조는 여러 갈래의 부대들을 중 좌 우 전 후의 5개의 위로 정리하고 각 위에 책임지역을 부여하였다.
지방에는 각 도에 육군을 운영하는 병영과 해군을 운영하는 수영을 하나씩 두었고 그 밑에는 진이 있었다. 함경도와 경상도에는 여진족과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둘씩을 두었고 전라도에는 수영만 둘 이썽ㅆ다. 5위는 임진왜란이 발발할 즈음에는 유명무실한 상태였고 왜란 중에 급히 훈련도감이라는 것을 만들어 군사를 양성하였다.
인조와 숙종 때에 가서야 국방체제를 재정비하였다. 서울에는 어영청, 금위영, 훈련도감을 두고, 서울 외곽 방어를 위해 북쪽 북한산에 북한산성을 쌓고 여기에 총융청을 , 남쪽에 남한산성을 쌓고 여기에 수어청을 두었다. 이를 통틀어 5군영이라고 불렀다.
수도권 방어를 위해서는 동쪽에 수원, 서쪽에 강화 , 북쪽에 개성, 남쪽에 광주에 각각 유수부를 두어 동서남북을 지키게 했고 이후 이것들이 조선군대의 기본 골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