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의 결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과 삼포왜란, 을묘왜변 정리

🌿 치유의 숲 2026. 2. 3. 03:16
조선시대의 왜구
왜구의 약탈은 조선이 세워진 뒤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으며, 그중에서도 생활 물자가 특히 부족했던 대마도 왜구의 행패가 가장 심했다. 조선은 무력만 쓰지 않고 달래는 정책도 함께 사용하여 그들에게 항복하거나 조선 사람이 될 기회를 주었고, 배를 운항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발급해 왜구의 배와 일반 무역선을 구별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여러 가지 대책을 마련했다.
세종대왕은 고려 때 박위가 정벌했던 적이 있는 대마도를 다시 한 번 정벌하였다(1419년). 또한 세종의 명령을 받은 이종무 장군은 227척의 군함을 이끌고 출정해 왜구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붙잡혀 있던 조선 사람들을 구출해 돌아왔다.
이때 대마도 영주 사타모리의 요청으로 진해의 내이포, 동래의 부산포, 울산의 염포 세 곳을 열어(이를 삼포라고 함) 그들과 무역을 허락하였다. 이후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 사이의 무역을 이어주는 중간 거점이 되었다.
조선은 대마도 정벌 이후 일본과 이웃 나라로서 평화롭게 오가자는 교린 정책을 실시했다. 교린 정책은 문제를 일으키는 왜인들을 멀리하면서도 동시에 달래는 정책이기도 했다. 이때 일본의 일부 지방 영주들은 조선이 명나라에 하듯이, 조선이 내려주는 명예 벼슬을 받고 형식적으로 조선에 예를 갖추는 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들 영주는 조선이 명과 하던 조공무역처럼 특산물을 조선에 바치고, 대신 자신들이 필요한 물품을 받아 갔다. 그러나 왜구의 침입은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아, 많을 때는 수백 척의 배가 한꺼번에 조선 수군의 진지를 공격하기도 했다.
조선의 적극적이고 강력한 토벌 작전으로 한동안 왜구의 활동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1400년대 후반 일본이 전국시대에 들어가 혼란해지면서 왜구의 움직임이 다시 활발해졌다. 이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 삼포왜란과 을묘왜변이다. 조선은 삼포를 열어 일본과 교역을 허락할 때, 그곳에 머무는 일본인을 60명으로 제한했다.
하지만 이 인원이 계속 늘어나자 조선은 이들에게 세금을 매기고 엄격하게 통제하기 시작했다(1494년 성종 25년). 이에 불만을 품은 약 5천 명의 왜인들이 대마도 영주의 지원을 받아 삼포를 공격했다(1510년 중종 5년).
왜구들은 대마도 영주의 아들을 우두머리로 삼고 내이포와 부산포를 포위했으며, 민가에 불을 지르고 지방 관리까지 죽이는 등 큰 피해를 입혔다. 이를 삼포왜란이라고 한다. 이에 출정한 조선 군대는 우두머리를 포함해 왜구 292명을 처형하고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끊었다.
1512년(중종 7년) 대마도 영주가 폭동을 일으킨 자의 머리를 바치며 사죄하고 다시 교류를 요청하자, 조선은 재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삼포 교역을 다시 허락했다.
그러나 왜인들은 약속을 어기고 1544년 통영의 사량진을 공격해 약탈을 벌였다. 이에 조선은 다시 삼포를 폐쇄하고 무역을 금지했다. 이후 일본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자 1547년(명종 2년)에 제포 한 곳만 열고 무역 규모를 줄여 교역을 허락했다.
하지만 일본은 또다시 약속을 어기고 1555년(명종 10년) 배 70여 척을 이끌고 전라도 남해안에 침입해 약탈과 살인을 저질렀다. 이를 을묘왜변이라고 한다. 조선은 이들을 토벌하고 왜인의 출입을 더욱 엄격하게 통제했다.
이번에도 대마도 영주가 교역 재개를 간청하자, 조선은 출입할 수 있는 배(세견선이라 함)를 5척 이하로 제한하여 허락했다. 이후 조선은 강하게 억제하는 정책과 달래는 정책을 함께 사용했다.
한편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조선은 판옥선(배 바닥이 평평하고, 그 위에 2층 구조의 건물을 세운 군함으로 임진왜란 때 주력으로 사용됨)을 만들고, 화약 무기를 비롯한 여러 무기의 개발에도 힘썼다. 결과적으로 삼포왜란과 을묘왜변은 훗날 일어나는 임진왜란의 전 단계 사건이 되었다.
 
 
 
 
 
중국의 왜구
왜구는 활동 지역을 점점 한반도보다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중국 대륙으로 옮겨 갔다. 이 때문에 명나라도 조선 못지않게 왜구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왜구는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서해를 건너 산둥반도와 남쪽의 푸젠성, 저장성 해안으로 향했고, 더 내려가 광둥성까지 이르렀다.
경험이 쌓이고 실력이 강해진 왜구는 멀리 필리핀, 베트남 등 동아시아 전역에서 활동했다. 중국은 거의 모든 해안 지역이 피해를 입었다. 1368년 명나라를 세운 태조 홍무제(주원장)는 왜구의 침입을 막아 달라고 요구하고 조공을 촉구하는 사신을 일본에 보냈으나, 일본은 외교 문서의 표현이 무례하다고 트집을 잡아 이를 거절했다.
이에 명나라는 일본과의 모든 무역을 금지했다. 중국과의 무역이 끊기는 것은 일본에도 큰 손해였기 때문에 무로마치 막부는 왜구가 납치해 온 중국인을 돌려보내며 명나라에 무역 재개를 요청했다(1401년). 그러나 두 나라가 협상을 진행하던 중 일본 내부에서 명을 윗나라로 인정하는 문제를 두고 반대가 일어나, 이번에는 일본이 명과의 무역을 금지했다. 그 결과 다시 왜구가 크게 늘어났다.
중국은 조선보다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왜구가 한 번 침입하면 한 달에서 석 달까지 머무르기도 했고, 인명 피해도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에 달했다. 중국에는 왜구의 잔혹한 행동을 기록한 자료가 많이 남아 있는데, 그 내용은 매우 참혹하다.
그들은 젖먹이 아기를 긴 장대 끝에 매달아 끓는 물을 끼얹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했다고 전해진다. 또 임신한 여성을 붙잡아 배 속 아이의 성별을 두고 내기를 한 뒤 배를 갈라 확인하고, 이긴 자에게 술을 마시게 하며 즐겼다는 기록도 있다. 그들의 술자리 주변에는 희생된 사람들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 중국인 중에도 왜구와 협력하거나 길 안내를 맡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지역에서는 오히려 중국인이 왜구를 고용해 해적 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왜구의 활동이 가장 심했던 시기에 명나라의 강력한 소탕 작전이 이루어졌고,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라를 통일한 뒤 국민의 해외 진출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면서 왜구의 활동은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곧 임진왜란으로 이어졌으니, 어떤 면에서는 임진왜란이 국가 차원에서 벌인 대규모 왜구 활동이라고도 볼 수 있다.
동아시아의 과거 역사를 돌아보면 일본은 중국과 한국으로부터 학문, 제도, 문자, 종교,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왜구의 약탈로 큰 피해를 주기도 했다. 왜구의 침략은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조선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길 때까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