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우리 민족은 반만 년의 긴 역사를 이어오면서 여러 차례 큰 외침을 겪었고, 그때마다 큰 시련을 겪었다. 그중에서도 조선 중기에 일어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특히 빼놓을 수 없는 전쟁이다. 이 두 번의 전쟁은 어느 정도 우리 스스로의 잘못도 있었다. 왕과 조정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고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판단했더라면 미리 막을 수도 있었고, 설령 침략을 당하더라도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은 조선이 건국된 지 꼭 200년이 되던 해였다. 조선은 이 200년 동안 몇 차례의 사화(정치적 숙청)와 왜구의 침략을 제외하면 대체로 평화로운 시대를 누려 왔다. 하지만 그동안 명나라에 의지하는 사대 외교와 유학 중심의 이상적인 정치 생각에 빠져 외부 침략에 대한 대비는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사이 나라 안에서는 정치 싸움, 기강 해이, 토지 독점, 군역과 부역의 문제, 국가 재정 부족 같은 여러 문제가 점점 쌓여가고 있었다. 게다가 학문을 중시하고 무력을 천시하는 사회 분위기까지 자리 잡으면서 외적의 침입에 대한 대비는 거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 결과 일본군이 침략해 왔을 때 조선은 오랫동안 이어진 평화를 당연하게 여기며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그 피해는 대부분 죄 없는 백성들에게 돌아갔다. 이런 모습은 이어서 일어난 병자호란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두 번의 큰 전쟁을 겪고도 조선의 지배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자 왕과 관리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예전 모습으로 돌아갔다. 조정에서는 계속 정치 싸움이 이어졌고, 관리들은 나라와 백성보다는 자신의 이익과 권력 다툼에 더 몰두했다. 백성들의 삶은 오히려 전쟁 전보다 더 어려워졌다. 설상가상으로 1650년 이후에는 거의 해마다 흉년이 들어 사람들 사이에 세상이 끝나 간다는 불안이 퍼졌고, 예언서나 떠도는 소문을 믿는 일까지 유행했다.
이 장에서는 먼저 조선의 국방 체계를 간단히 살펴보고, 그에 앞서 사대 외교와 유학 사상이 조선의 국방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아본다. 그리고 고려 때부터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혀 온 왜구의 활동을 살펴본 뒤, 본격적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야기로 들어가려 한다.
1. 조선의 국방 체제
조선 왕조를 떠받친 두 가지 큰 축은 밖으로는 명나라를 섬기는 사대 외교, 안으로는 유학(특히 주자학) 이었다. 조선에서 사대 외교와 유학은 정치와 외교뿐 아니라 국방에도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조선 사회 전반에 학문을 중시하고 군사력을 가볍게 여기는 분위기가 자리 잡은 것도 이 두 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그래서 먼저 사대 외교와 유학이 국방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고, 이어서 조선의 국방 제도와 조직을 알아보려 한다.
사대 외교와 국방
조선은 건국 과정에서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이후 명나라와의 관계를 ‘사대’로 정하면서, 명을 섬기는 외교 정책을 기본 방침으로 삼았다. 처음 이성계가 명과 가까워지려 한 것은 정치적 이유보다는 당시 국제 정세를 냉정하게 판단한 결과였다. 하지만 조선을 세운 뒤에는 새 왕조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한 방법으로 명나라의 권위를 이용했고, 이것이 점점 사대 외교로 굳어졌다.
이성계는 중앙의 명문 가문 출신도 아니었고, 근거지도 변방 지역이었기 때문에 고려의 기존 권력자들을 제압하는 데 명나라의 존재가 필요했다. 즉, 군사 정변으로 집권한 뒤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굳히기 위해 명을 의지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사대 외교는 이후 조선의 정치, 국방, 외교 전반에서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은 명나라를 떠받드는 태도가 점점 심해졌고, 그만큼 스스로의 주체성과 자주성은 약해졌다. 왕부터 말단 관리까지 사대의 명분을 거의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명나라가 망하고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들어섰을 때도, 조선의 왕과 관리들은 여전히 명나라를 ‘정통 중국’으로 여기며 아쉬워했다. 명이 멸망한 뒤에도 명을 섬긴다는 의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숙종은 청나라의 눈을 피해 창덕궁 깊은 곳에 몰래 제단을 만들고,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와 임진왜란 때 군사를 보내 준 황제를 기리는 제사를 지냈다. 영조와 정조 때도 이런 제사가 이어졌고, 이는 대한제국이 선포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학자 송시열 역시 개인적으로 명나라 황제를 기리는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이처럼 조선이 명나라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태도를 보이자, 명과 청은 조선을 아래 나라로 여기며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조 때 재상 체제공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남긴 기록에는, 중국 관리들이 뇌물을 요구하고 위세를 부리며 조선 사신들을 괴롭혔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이런 일을 겪으며 힘없는 나라의 처지를 한탄했고, 자신의 기행문 제목도 ‘원통함을 참고 삼킨다’는 뜻으로 지었다. 이런 기록은 약한 나라가 살아남기 위해 겪어야 했던 고통을 보여 주지만, 따지고 보면 지나친 사대 외교의 결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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