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의 침략
임진왜란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계속되어 온 왜구의 침략과 그 피해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왜구는 일본인들로 이루어진 해적 무리를 말한다. 이들은 7세기부터 16세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우리나라 해안 지역을 수시로 침입해 식량과 재산을 빼앗고, 사람을 해치거나 마을을 불태우는 등의 약탈을 일삼았다.
일본은 산이 많고 평야가 적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좁았다. 그래서 늘 식량이 부족했는데, 이러한 이유로 왜구는 먹을 것을 빼앗기 위해 가까운 한반도로 건너오곤 했다.
이들의 첫 번째 목표는 식량이었고, 그다음은 각종 물건을 약탈하는 것이었다. 또한 몸값을 요구하기 위해 사람을 납치해 가는 일도 많았다.
한반도는 삼국시대 때부터 왜구의 침입에 시달려 왔다. 특히 일본과 가까웠던 신라가 큰 피해를 입었고, 이를 막기 위한 대책 마련에 힘썼다. 왜구의 활동이 가장 심했던 시기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였다.
왜구는 적게는 배 2~3척, 많게는 50척에서 200척, 심지어 500척에 이르는 큰 선단을 이루어 몰려오기도 했다. 이런 침입이 계속되자 해안가에서 농사짓던 백성들은 왜구를 피해 내륙으로 옮겨 살았고, 그 결과 바닷가의 비옥한 농토가 버려져 황폐해지는 일도 많았다.
왜구의 주요 근거지는 대마도와 그 건너편의 규슈 지역이었다. 이곳은 땅이 척박하고 산지가 많아 스스로 먹고살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그래서 한반도와의 교역, 즉 물건을 사고파는 일이 생계에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 지역 사람들은 교역이 잘 이루어질 때는 비교적 조용했지만, 교역이 막히거나 제한되면 약탈이 급격히 늘어났다. 그래서 대마도와 규슈의 영주(그 지역을 다스리던 책임자)들이 고려와 조선 조정에 교역을 허락해 달라고 자주 요청하기도 했다.

고려시대의 왜구
고려 시대에 왜구의 침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은 고려 고종 10년(1223년) 무렵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 해에만 김해 지역이 11차례나 침략을 당했다.
이 시기는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맞서 싸우던 대몽항쟁 시기였으며, 고려 조정이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상태였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 온 사신(외교 사절)이 고려 정부를 직접 만나기 어려워졌고, 공식적인 교역도 사실상 끊기게 되었다.
그 결과 이전에 이루어지던 정상적인 무역은 몰래 이루어지는 밀무역으로 바뀌었고, 이것이 불법이 되면서 왜구의 약탈로 이어지게 되었다.
고려가 몽골과의 오랜 전쟁을 치른 뒤 원나라의 간섭을 받는 약한 상태가 되자, 왜구들은 더욱 대담하게 침입해왔다. 당시 일본 내부의 극심한 정치 혼란도 왜구의 약탈을 부추겼다.
그 시기 일본은 약 200년 동안 남북조 시대와 전국시대라는 혼란한 시기를 겪고 있었는데, 이는 중앙의 통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를 뜻한다. 나라의 질서가 무너지자 백성들은 생계를 위해 바깥으로 나가 약탈에 나섰다.
처음에는 마을 단위의 소규모 도둑질에 가까웠고 약탈도 비교적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런 약탈이 반복되며 이익이 커지자 점점 규모가 커지고, 행동도 더욱 잔인해졌다.
당시 왜구의 모습을 묘사한 기록도 있다.
“우두머리가 소라 껍데기로 만든 나팔을 불어 신호를 보내면, 거의 알몸에 가까운 차림의 왜구들이 일본도를 휘두르며 순식간에 사람을 죽이고 약탈한 뒤 빠르게 달아났다. 모든 행동이 매우 재빠르고 조직적이었다.”
약탈로 큰 수익이 생긴다는 것이 알려지자, 해안 지역의 **호족(지방의 힘 있는 세력)**과 **수령(지방 행정 책임자)**들까지 나서서 조직적으로 참여했다. 이들은 배 여러 척을 편대로 묶어 마치 해군처럼 움직이며 약탈을 본업처럼 삼았다.
이들은 스스로를 **해적중(해적 무리)**이라 불렀는데, 이는 자신들도 해적임을 인정한 셈이었다. 그중 규슈 지역의 미쓰우라라는 인물이 이끄는 해적 무리가 특히 유명했다.
이들은 한 번 출동하면 400~500척의 배에 수천 명이 움직였으니, 사실상 정규 해군에 가까운 규모였다. 활동 범위도 한반도 남해안에서 시작해 서해안을 따라 북상했고, 서해를 건너 중국 요동반도와 발해만까지 이르렀다.
왜구는 몽골군이 일본을 공격하던 시기에는 잠시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충정왕 2년(1350년) 이후 다시 침입하기 시작해, 몽골 지역 깊숙한 곳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심지어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강화도와 예성강까지 습격해 수도의 치안까지 위협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개경 근처까지 온 왜구는 지방에서 조정으로 보내던 세금과 공물을 중간에서 가로채고, 주민을 붙잡아 노예처럼 부리기도 했다.
우왕 재위 기간(1374~1388) 14년 동안 왜구의 침입은 절정에 달해 무려 378회나 기록되었다. 이로 인해 고려는 국력이 크게 약해졌고, 나라의 멸망을 재촉할 만큼 큰 피해를 입었다.
물론 고려 정부도 일본 막부(당시 일본의 군사 정권)에 사신을 보내 왜구 단속을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 역시 혼란한 상황이라 왜구를 통제할 힘이 없었고, 결국 고려는 스스로 왜구 토벌에 나섰다.
그 결과 여러 차례 큰 승리를 거두었다.
1376년 최영의 홍산대첩(부여), 1380년 최무선의 진포해전(군산), 이성계의 황산대첩(지리산 부근), 1383년 정지의 관음포대첩(남해), 1389년 박위의 대마도 정벌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와 규슈를 완전히 정리하지는 못해, 이러한 승리들은 일시적인 효과에 그쳤다.
이 시기 왜구 격퇴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 최무선이다. 그는 중국에서 화약 제조 기술을 배워 돌아와 조정에 건의했고, 그 결과 **화통도감(화약 무기 연구·제작 기관)**이 설치되었다. 여기서 만든 각종 화포(대포)는 왜구 토벌에 큰 역할을 했다.
최무선은 직접 전투에도 참여했다. 진포해전에서 밧줄로 서로 묶여 있던 왜선 500여 척을 향해 새로 만든 화포를 집중 사격해 대부분을 격파했고, 붙잡혀 있던 백성 330명을 구해냈다.
이때 육지로 도망친 왜구들은 남원 운봉 지역에서 이성계에게 토벌되었다. 최무선의 진포해전은 이후 세종 때의 대마도 정벌과 함께 왜구 토벌 역사에서 가장 큰 성과를 거둔 전투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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