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사대는 국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여기에는 좋은 점도 있었고 나쁜 점도 있었다. 하지만 나쁜 점이 더 컸기 때문에 먼저 그 부분부터 살펴보겠다.
부정적인 면
국방 측면에서 사대주의가 가져온 가장 큰 문제는 나라를 지킬 힘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외부에서 가장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던 명나라를 스스로 받드는 나라가 되면서 외적에 대한 긴장감이 사라졌다. 그 결과 조선은 강한 군대를 키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북쪽의 여진족과 남쪽의 왜구 침입을 막을 정도의 병력만 유지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조선의 왕과 관리들은 명나라를 믿고 강한 군대를 기를 생각을 하지 않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아예 그런 개념 자체가 희미해졌다. 자연스럽게 조선은 학문에만 힘을 쏟게 되었고, 몸을 단련하고 전투를 준비하는 일은 소홀해졌다. 그 결과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강인함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 시대 내내 군인과 무관(무과 출신 관리)은 무시받는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무관이 되어도 맡을 일도, 설 자리도 마땅치 않았고 나라 전체적으로 무(武)를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국가와 인간의 본성상 스스로를 지킬 힘을 갖추는 것은 매우 기본적인 일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의 모습은 정상적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조선 500년 역사 동안 제대로 된 무사 계층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은 세계 역사에서도 드문 일이다. 조선이 이렇게 지내는 동안 이웃 일본은 오히려 무사 계층이 사회와 국가의 중심을 이룰 정도였다. 몸으로 싸우는 것이 일상이 된 일본과, 말과 이론으로만 다투는 데 익숙해진 조선이 맞붙었을 때 결과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결국 조선 말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결과로 이어졌다.
무인은 현실을 중시하고 결단이 빠르며 행동이 과감한 특징이 있다. 반면 문인은 명분과 논리를 앞세우지만 실제 문제 해결에는 느리고 우유부단한 경우가 많다. 세상은 결국 행동하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인다. 물론 학자들이 생각과 이론을 제공하는 역할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나라를 지킬 수는 없다.
조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채 맞았고, 조선 말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은 사대주의의 영향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나라의 먼 미래를 생각한다면 처음부터 국방의 부담을 감수하더라도 스스로 나라를 지킬 힘을 기르는 길이 훨씬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긍정적인 면
위에서 본 것처럼 우리는 보통 조선의 사대주의를 부정적으로만 본다. ‘사대’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긴다’는 뜻이기 때문에 독립 국가로서 자존심을 지키는 태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대주의에도 나름의 현실적인 이점은 있었다. 자존심보다는 실리를 택한 선택이었던 셈이다.
조선은 태종, 세종, 세조 같은 능력 있는 왕들이 기초를 튼튼히 다지면서 나라 안팎이 비교적 평온한 시기를 오래 유지했다. 이런 안정에는 사대 외교가 한몫했다.
나중의 결과는 별개로 하더라도, 당장 조선이 사대를 통해 가장 큰 이득을 본 분야 중 하나가 바로 국방이었다. 나라를 운영하는 데 가장 많은 비용이 드는 것이 군사인데, 가장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명나라와 싸울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국방비 부담이 크게 줄었다. 태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시기의 왕들이 외부의 위협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국내 정치와 제도 정비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 덕분이었다.
물론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고, 새 왕이 즉위하면 명으로부터 공식 인정을 받고, 조공을 보내고, 중요한 일을 미리 알리고 허락을 받는 절차는 독립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조선이 명나라로부터 내정에 간섭을 받거나 외교에서 심각한 제약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조공 역시 형식적으로는 윗나라에 바치는 예물이었지만, 실제로는 무역의 성격이 강했고 조선은 이를 통해 경제적, 학문적, 기술적인 이익을 많이 얻었다. 이런 점을 보면 사대주의를 무조건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조선의 왕들이 명나라 황제를 위한 제사를 지낸 것도 이런 관계에 대한 일종의 감사 표시였다. 이때 명나라와 조선 모두 사대의 본질이 형식적인 예절이며, 명의 체면을 세워주는 상징적인 행동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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